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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지

by 청산. 2011. 8. 27.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지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322-4

 

화성에 왔으니 꼭 차아 보아야 할 곳이 있었습니다.
우리민족의 수난과 아픔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 입니다.
3.1만세운동 당시 제암리 주민들은 국권 회복을 위하여
만세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 하였다 합니다.
그 결과로 일본군에게 주민들이 무참히 학살된 역사의 현장을
후손들이 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애국정신을 이어 가고자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지를 조성 하였다 합니다.

제암교회와 3.1운동 기념관

현재의 제암교회는 실제 산건의 현장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여 신축된 건물이라 합니다.

 

 

3.1운동 순국기념관에서는 제암리 사건에 얽힌 역사적 자료를 모아 전시함으로써
제암리 주민들의 깊은 나라사랑을 느낄 수 있고 내 나라의 소중함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언덕위에 조성된  23위묘로 올라가는 계단 입니다.
태극기가 줄지어 게양된 계단을 오르면서 나라를 사랑했던 그들의 넋을 기려봅니다.

도이리 공동묘지에 평토장으로 안장되었던 23위의 순국선열들의 유해를

제암리 현장의 산증인인 전동례 할머니와 최응식 할아버지의 증언으로

제암교회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여 그 넋을 위로하고 있다 합니다.

그들의 피와 함성이 있었기에 조국이 독립되어 우리강산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습니다.

학살의 현장 제암교회 터에는 3.1운동순국기념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날의 함성과 절규를 뒤돌아 보니 가슴이 아파 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내가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아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암리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 도시오 일본 육군 중위가 이끄는 일단의 일본군경이 앞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제암리에 도착해서 마을 주민 약 30명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주민들이 교회당에 모이자 아리타는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그때 한 부인이 어린 아기를 창 밖으로 내어놓으면서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일본군경은 그 아이마저 찔러죽였다.
이같은 학살을 저지른 일제는 증거인멸을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으며 아직 죽지 않은 주민들이 아우성을 치며 밖으로 나오려고 하였으나 모두 불에 타 죽었다.
이때 교회당 안에서 죽은 사람이 23명, 뜰에서 죽은 사람이 6명이었다.
[자료출처]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