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울.경 기.인천..

조선시대 행궁의 으뜸 화성행궁

by 청산. 2011. 6. 7.

조선시대 행궁의 으뜸 화성행궁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

 

도심속에 자리잡은 화성행궁...
그...행궁을 접하기 위하여 수원을 방문하여 천천히 둘러 봅니다.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 휴양, 능원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합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전배하기 위하여 행행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부사가 집무하는 부아로도 활용하였다고 합니다.
정조는 왕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을 정기적으로 행하였고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 1년 행궁 곁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였는데 그뒤 순조·헌종·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화성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수많은 행궁 중 그 규모나 능행면에서 단연 으뜸이 될 만큼
건축물의 규모 뿐만 아니라 성곽과 더불어 정치적·군사적 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라 합니다.

신풍루 전경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정조 14년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라고 하였으나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고 합니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라 합니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 이라고 합니다.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 이라고 합니다.

 경룡관을 2층 구조로 건물의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아 누마루를 만들고

아래층은 3칸의 널문을 만들어 '지락문'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 이라고도 하며
1795년 정조 19년에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고 합니다.

 

 

 

 

 

 

 낙남헌은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중 하나로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 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 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고 합니다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운한각

 

 

 

 

 

 

장락당은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고 합니다.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화성행궁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 광장 한켠에.......

세계문화유산 이란 수원화성 이정목에 세계의 주요도시 거리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가진 우리나라...

그 문화와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뒤새겨야 하는지

새삼 나에게 물음표를 던지는 시간 이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