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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 북..

박달과 금봉의 애절한 사랑이 깃든 박달재

by 청산. 2010. 5. 20.

박달과 금봉의 애절한 사랑이 깃든 박달재
2010년 05월 17일 월요일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 산71

 

박달재 터널로 인하여 무심코 지나치던 박달재 고개를 10여 년만에 방문해 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것이 없다면 울고넘는 박달재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 나오고 있다는 것일뿐 세월이 흐른만큼 많은것이 변한듯 했습니다.
그 옛날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박달재에는 공원이 조성이 되었으며

박달재 광장 건너편에는 박달과 금봉낭자의 사연을 형상화한 조각상이 있으며
박달재 광장을 끼고 있는 산마루에는 목조각 공원이 조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박달재의 설화를 알아보면
조선조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 하룻밤을 묵게 되었고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있었는데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으며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초초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그날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도 역시 잠을 못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고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아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새 가까워졌으며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몇일을 더 묵었으며 밤마다 두사람은 만나 정분을 쌓았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하고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싸리문 앞을 떠나지 않았으며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아무일도 못하고 없어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던 박달은 결국 낙방을 하고 말았으며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나 보내고는 날마다 서낭에서박달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으며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사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와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박달은 땅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으며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쫒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은 잡을 수 있어 와락 금봉을 끌어 안았으나 박달은 천길 낭떨어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의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